생몰연도 181년~234년 10월 8일(양력) 향년 52~53세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
자는 공명(孔明), 작위는 무향후(武鄕侯), 시호는 충무(忠武).
와룡 또는 복룡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형주에 머물다 유비를 따르기 시작했으며, 이후 유비 세력의 대전략과 내정을 담당하였다. 촉한이 건국되자, 초대 승상 직위에 임명되었고, 유비 사후에는 군권을 포함해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다. 한중에 막부를 두며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모두 결정했다.
탁월한 능력과 뛰어난 충성심으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훌륭한 신하이자 재상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군사 또는 참모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삼고초려, 수어지교, 출사표, 난공불락, 칠종칠금, 읍참마속 등 현대에도 전해지는 여러 고사성어의 유래와 깊이 관련된 인물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후한 말 형주의 사족이자 소열제 유비의 신하, 그리고 촉한의 승상이다. 형주를 아직 유표가 다스리던 무렵, 그의 아래에서 힘을 모으던 유비에게 기용되었다. 이에 얽힌 사자성어로 삼고초려가 전해진다.
유종이 항복하고 조조군이 남하하자 유비는 하구까지 피난했는데, 제갈량은 하구에서 노숙을 따라 손권에게 사자로 파견되어 동맹을 체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유비 세력의 일원으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적벽대전과 뒤이은 남군 공방전이 마무리되고 유비가 손권에게서 형주를 빌리자, 형주의 여러 군을 맡아 군대를 보급하였다. 유비가 익주로 향했을 때 처음에는 형주에 머물렀고, 익주에서의 전쟁이 격해지자 장비와 함께 물길을 따라 익주로 향하며 현들을 정복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제갈량 최초의 군사활동이나, 여기에 그가 얼마나 관여하였는지, 구체적인 전개가 어땠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유비가 무리한 원정으로 신생국가인 촉의 국력을 소진시킨 후, 유비는 자신의 후계자인 유선을 보좌할 보정대신으로 이엄과 제갈량을 두었다. 행정권은 제갈량에게, 군권은 이엄에게 맡김으로써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수행하였으나,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손오와 군사동맹을 회복한 뒤 남만에서의 반란 진압을 근거로 군권을 장악하였으며, 최초 반란중심지인 월수군을 제외한 남만에 간접적인 복속만을 받은 채로 돌아와 북벌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갈량은 촉의 행정, 인사, 군권, 상벌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으며, 자신이 대규모 원정을 입안, 실행하였다. 같은 보정대신이었던 이엄을 탄핵한 제갈량은 명실상부한 촉 정계의 일인자가 되어 북벌을 주도하였다. 제갈량의 집권 기간 동안 그의 막부가 머무르는 한중은 촉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으며, 신하임에도 후임을 지목할 수 있었고 후임자로 지목된 장완과 비의 역시 한중에서 촉 전체를 통치해나갔다. 비의 대까지 제갈량의 정치적 후계자들은 촉한의 전권을 행사했으며, 이는 진지와 황호가 집권한 시기에 들어서야 막을 내렸다.
제갈량의 북벌은 대체로 과단성보다 견실함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방향성은 천수가 호응하였으나 느린 행보로 인하여 좌절된 1차 원정에서 보이듯 공세적인 원정의 승리를 담보하기 어렵게 하는 한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병력을 온존할 수 있게 하였다. 제갈량이 주도한 북벌은 명백한 한계를 맞이했다. 그는 북벌에 뒤따르는 보급 문제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으며 이는 제갈량 개인이나 촉한이라는 시스템의 문제 이전에 전근대 보급체계의 한계였다. 결국 제갈량은 5차 원정 도중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제갈량은 사후, 촉한 2대 황제 유선에 의해 충무후에 봉해진다. 사후에 미화가 진행되었으며 당대 기록에서도 단편적으로 확인된다. 남만이라고 불리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남조는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제갈량을 신격화했는데, 현재에도 남만 일대에서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과장된 전승들이 전해져 내려오며, 연구자들은 이를 남조 대에 이뤄진 의도적 신격화의 영향으로 본다. 사후 남송 대에 이르러 제갈량은 그의 군주인 유비와 함께 강하게 신격화되었고, 원 대의 삼국지평화, 명 대의 삼국지연의를 거쳐 현대에까지 통용되는 제갈량의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현대 동아시아에서 제갈량은 강력한 문화적 상징이다. 그가 지나친 장소들, 혹은 신빙성이 거의 없는 민간전승조차 다양한 문화 상품으로 개발되어 판매된다. 한편으로 현대 역사가들은 오랜 기간동안 신격화된 제갈량의 이미지를 객관적인 연구를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하고 있다. 예컨데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는 제갈량의 남방 정책이 실질적인 개발로 이뤄지지 못해 국력을 신장시키지 못했음을 지적하였고, '존 킬리그루'는 제갈량의 북벌을 다룬 논문에서 전반적인 군사적 능력을 비판하며, 그가 불필요한 전쟁을 유지하였고 원정 전반에 어떠한 중대한 정치적 혹은 군사적 성공도 거두지 못했음에도 비운의 영웅으로 포장되었다고 평가했다. '케임브리지 중국사'의 촉 파트를 저술한 '마이클 파머'는 지나친 제갈량 고평가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비판했다. 통사 레벨을 벗어나 현대 중국 주류 사학계의 논문을 봐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현대 중국 사학계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에 회의적인 의견이 정설로 인정되며, 이제는 되려 제갈량의 북벌과 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이 스스로를 주류 사학에 도전한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민간전승에서 제갈량은 몇몇 발명품, 혹은 음식의 시초로 전해진다. 그중에 제갈량의 발명품 가운데 사료적으로 근거가 확실한 것은 제갈노, 목우, 유마이다. 제갈노는 기존 연노의 개량품으로 간주되나 정확한 실물은 전하지 않아 개량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없고, 목우와 유마는 현대 학계에서 외바퀴 수레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외바퀴 수레와 연노는 촉에 앞서 한 왕조에서 이미 실존했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나타나므로, 이들 역시 엄밀히는 발명이 아니라 개량에 가까우며, 정확한 실체는 전하지 않는다. 목우, 유마는 진령산맥이라는 자연경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원활한 보급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만들어졌다는 기록 바로 다음에 보급 부족이 적힌 점을 미루어볼 때, 근본적인 보급 문제 해결은 불가능했고, 이는 전근대 육로 보급의 한계를 생각해 볼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보인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을 평하는 글에서 그가 상국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썼다. 상국이란 나라의 재상을 일컫는데, 승상의 다른 이름이다. <계한보신찬>에는 제갈량이 선제 유비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시기 제갈량은 이미 승상이었으므로 명목상 내지 명예직으로 한 단계 더 윗 자리인 상국에 올랐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후한서 백관지와 진서 직관지 모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설이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승상과 대사도, 상국은 모두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직위였고, 이는 진까지 이어진다.
업적
사실 제갈량은 소설 삼국지, 특히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듯이 기략을 꾸며내는 군사적인 천재라기 보다는 정치의 천재였다. 픽션보다 현실이 더 대단한 사람인 사례로, 형주를 잃고 이릉대전 이후 거의 망국의 길로 접어든 촉한을 5년 안에 안정시키고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늘려 북벌이 가능하게 한, 행정과 정치의 초인이라고 봐도 좋다.
지금보면 당연하다 할만한 업적이지만 제갈량이 살았던 시기는 지금보다 1,700년도 전의 시기이다. 사실 제갈량이 현실에서 이룬 업적은 오버 테크놀로지에 가까운 것으로 연의에서 묘사된 군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 한 번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대부분 잃고, 쫄딱 망한 나라를 단 5년만에 부강한 부자나라로 만들어 건국 당시 국력 및 경제력의 열배 이상 차이나는 위나라를 따라잡고 북벌을 시작한 것이다. 한마리로 말해 자신의 천재성을 쥐어짜 극한까지 펼쳐낸 천하의 기재임은 연의 소설이나 실제 역사에서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